안녕하세요 여러분, 지식마블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연설이죠?
스티브 잡스를 그리워하며,,,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의 그의 명연설과 멋진 표현들 보시죠.
[아래 영상 클릭]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저는 오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 중 하나인 스텐포드 대학 졸업식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이번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가까이 와본 경우입니다. 오늘 저는 제 삶에서의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게 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딱 세 가지 이야기 입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 번째 얘기는 점들을 연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 칼리지를 첫 6개월을 다니다가 중퇴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정말 중퇴하기 전까지 약 18개월 동안은 청강생으로 주위에 머물렀습니다. 왜 제가 중퇴를 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이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저의 생물학적 어머니는 젊고, 결혼도 하지 않은 대학 졸업생이어서 저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졸자에 의해 입양되기를 강력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전 태생이 변호사와 그 부인에게 입양되도록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제가 출생할 때 그들이 마지막 순간 여자 아기를 바랬다는 결정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그래서 나의 부모님들은, 대기명단에 올라 있었는데, 한 밤중에 “원하지 않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기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의 생모께서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의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셨고, 저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으신 분들이었습니다. 저의 생모는 입양서류에 서명을 거부했지요.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언젠가 나를 대학에 보내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마음이 누그러지셨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순진하게도 스텐포드만큼이나 등록금이 비싼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층에 속하는 부모님의 모든 돈이 내 대학 등록금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6개월 후 저는 대학에서 가치를 발견치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떻게 대학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에서 내 부모님이 평생토록 모아둔 돈을 다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퇴를 결심했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당시는 무척 두려웠었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은 제가 한 최선의 결정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그 순간 저는 관심 없었던 필수 과목들을 이수할 필요가 없었고, 관심 있어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하기 시작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모두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숙사도 없었고, 친구가 쓰는 방의 바닥에서 잠을 잤고, 먹을 음식을 사기위해 콜라병을 모아 돌려주며 5센트씩 모았고, 매주일 밤에 일주일에 한번 음식을 실컷 먹기 위해 헤어 크리쉬나 사원까지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호기심과 직관을 따름으로써 내가 불안하게 시작한 것들의 많은 부분이 나중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그 당시에 리드 대학은 미국에서 아마도 최고의 서법강좌를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전 캠퍼스의 모든 포스터, 서랍장에 붙인 모든 안내문은 아름답게 씌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자퇴하고 정규과정을 수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법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기 위해서 서법 강좌를 수강하기로 결정했고, 저는 serif 서체와 san serif 서체를 배웠습니다. 즉 글자들의 서로 다른 조합을 할 때 자간을 다양하게 변경하는 것에 관해, 무엇이 서체를 멋지게 만드는 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이것은 내게 아름답고, 역사적인 것이었으며, 과학이 포착할 수 없는 미묘한 예술성을 갖는 것이었고 저는 그것에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러한 어떤 것도 내 삶에서 실제적인 적용을 위한 희망을 갖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처음 매킨토시 컴퓨터를 처음 디자인할 때, 다시 모든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맥에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습니다. 맥은 아름다운 활자(typography)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대학에서 그 과정을 청강하지 않았더라면, 맥은 결코 다양한 서체와 자간의 균형이 잘 맞는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윈도우가 맥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에, (만일 모방하지 않았더라면)개인용 PC는 그런 글자체들을 지금 갖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저는 결코 이러한 서체 강좌를 수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들은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을 다닐 당시에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돌아보니 아주 명료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해서, 미래를 바라보면서 점들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과거를 바라보면서만 점들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거의) 점들이 당신의 미래의 점들로 어느 정도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에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본능적인 것, 운명, 삶, 카르마(인연, 숙명) 그 무엇이든. 이런 접근은 결코 저를 낙담시키지 못했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twenty. We worked hard, and in ten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the Macintosh, a year earlier. And I'd just turned thirty,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thirty,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행운아였습니다. 일찍이 제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으니까요. 워즈와 저는 스무 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애플 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에 애플은 달랑 두 명뿐인 차고에서 4,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바로 전 해에 우리는 최고의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었죠. 그때 저는 막 서른이 되었고, 그리고 해고를 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될 수 있을까요? 음... 애플이 성장하면서 우리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해갈 매우 재능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첫 1년 여 동안에는 모든게 순조로웠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래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갈라지게 되었죠. 우리가 갈라서자 회사의 이사진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나이 서른에 저는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제 성년기 인생 전부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사라졌고, 저는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저는 수개월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난 세대의 기업가들을 실망시키고, 마치 내가 전달받은 바턴을 떨어뜨린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패커드과 밥 로이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일을 망친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공적으로 실패했고 심지어 실리콘 벨리에서 도망칠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천천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 저는 여전히 제가 한 일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애플에서의 일어났던 사건들은 제가 그 일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거절당했지만 여전히 그 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저는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애플에서 쫓겨난 것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가벼운 기분으로 바뀌었고, 모든 것에 대해 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저로 하여금 제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절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그 이후 5년 동안, 저는 NeXT라는 회사와, Pixar라는 또 다른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부인이 될 대단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Pixar는 곧 이어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어냈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놀랄만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애플은 NeXT사를 샀고, 저는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NeXT에서 개발된 기술은 애플의 현 부활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로린과 저는 멋진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여러분의 일이 삶의 많은 부분을 채워줄 것입니다.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을 훌륭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맘에 덜 드는 일을 하지 마세요. 마음에 관한 일들이 다 그렇듯이 언젠가 발견하는 순간 (이것이다 하고)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관계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좋아지게 됩니다.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으시고 적당한 것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만약 제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독하게 쓴 약이었지만 저는 환자에게 그런 약이 필요한 것임을 압니다. 때때로 삶이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치게 됩니다. 신념을 잃지 마십시오. 저는 저를 계속 유지시켜주는 유일한 힘은 제가 한 것을 사랑하는 것임을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사랑에서도 그렇듯이 일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세였을 때 “매일 매일이 당신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당신은 당신의 삶의 여정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된다.”와 같은 인용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인상적이었고, 그 이후로 지난 33년 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길 원하는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리고 연속적으로 많은 날 동안 “아니요”라고 대답하게 될 때, 저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압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나는 곧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할 때 지금까지 알게 된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 - 외부로부터의 기대들, 자부심, 창피함이나 실패의 두려움 - 이런 것들은 죽게 되면 진실로 중요한 것만 남긴 채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곧 죽게 될 거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뭔가를 잃게 될 거라는 (두려운) 생각의 덫을 피하는 제가 아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잃게 될 것에 대해)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고,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 전쯤, 저는 암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전 7:30에 정밀조사를 받았고, 분명하게 췌장에 종양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심지어 췌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제게 이것은 치료할 수 없는 형태의 암이라는 것을 말해줬고, 저는 고작해야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도 살 것을 기대해야 했습니다. 제 의사는 집에 돌아가서 제반 사항들을 정리하라고 조언했고, 이는 의사들이 죽음을 준비하라고 할 때 쓰는 절차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단지 수개월 내에 제가 앞으로 10년 동안 자녀들에게 알려주하려고 했던 모든 것을 알려줘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가족들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는지 확인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그런 진단을 받으며 하루 종일을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저는 조직검사를 했습니다.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내시경은 위를 지나 나의 창자 속으로 들어갔고, 바늘을 췌장 속으로 넣어 종양으로부터 몇 개의 세포를 떼 냈습니다. 저는 차분했지만 함께 있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검사하면서 소리치기 시작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아주 휘기한 형태의 췌장암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현재 건강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이것이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직면했던 일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가장 가까운 것이기를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서, 저는 현재 여러분께 죽음의 유용함을 이것이 순수하게 지적 개념이었을 때보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천국을 가길 원하는 사람조차도 죽어서 그곳에 가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사람의 공통의 종착지입니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인생에서 유일한 최고 발명품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동인(動因)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람들에 길을 내주기 위해 구세대 사람들을 치워줍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들이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부터 멀지 않은 어느 날 여러분은 점차 구세대가 되어 치워지게 될 것입니다. 너무 극적인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는 정말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삶을 사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어떤 신조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의견이 당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가지고 여러분의 마음 속 내면의 소리와 직관을 따르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은 이미 여러분이 진정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로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at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 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엄지들고 차를 유혹해서 빌려 타며 여행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계속 갈망하십시오. 계속 우직하게 가십시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계속 갈망하십시오. 계속 우직하게 가십시오.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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